송창식 나이 노래 부인 한성숙 아내 결혼 자녀 딸 아들 입양 혼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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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숙 나이 결혼 남편 송창식

출생: 1948년 (72세), 대한민국

배우자: 송창식 (1977년–)

송창식 나이 학력 고향 가족 관계 자녀 딸 아들 종교

출생: 1947년 2월 22일 (73세), 인천광역시 신흥동

배우자: 한성숙 (1977년–)

학력: 인천신흥초등학교, 인천중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앨범: 송창식 2집, 송창식 1집, 송창식 골든 제3집, 송창식 골든 제2집

자녀: 송결, 송빛터, 송무늬

이름

송창식 (宋昌植)

출생

1947년 2월 22일1 (73세)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가족

아내 한성숙 | 아들 송결 | 딸 송빛터 | 송무늬

본관

진천 송씨

직업

가수 | 작곡가 | 기타리스트

학력

인천신흥초등학교

인천중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종교

불교→개신교

송창식 노래 앨범 히트곡 대표곡

대표곡

한국적 정서를 살린 음악과 개성있는 가창력으로 인기를 모았다. 주요 곡으로 〈고래사냥〉, 〈그대 있음에〉, 〈날이 갈수록〉, 〈사랑이야〉, 〈상아의 노래〉,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피리부는 사나이〉, 〈우리는〉, 〈푸르른 날〉, 〈하얀 손수건〉, 〈가나다라〉,〈한번쯤〉등이 있다.

앨범

《송창식 애창곡 모음: 별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1971년 2월 유니버어살)

《송창식 애창곡 모음 2집: 나는 너 / 내 나라 내 겨레》(1972년 유니버어살)

《Brand New Song》(1973년 11월 유니버어살)

《송창식 1》(1975년 8월 유니버어살)

《송창식 2》(1975년 8월 유니버어살)

《Song Chang Sik》(1976년 8월 신세계)

《그대 있음에,이슬비》(1976년 11월 신세계)

《송창식 독집: 가위바위보》(1978년 6월 신세계)

《사랑이야, 토함산》(1978년 7월 서라벌)

《송창식 골든앨범: 그대 있음에,새는》(1979년 11월 신세계,예음)

《`80 가나다라》(1980년 9월 한국음반)

《송창식 골든 제1집》(1982년 2월 한국음반)

《`82 송창식》(1982년 2월 한국음반)

《송창식 16》(1983년 2월 서울음반)

《`83 송창식》(1983년 5월 한국음반)

《송창식 골든 제2집》(1986년 11월 한국음반)

《`86 송창식: 참새의 하루》(1986년 11월 한국음반)

《다시 부르는 노래》(1987년 12월 한국음반)

《송창식 골든 제3집》(1988년 10월 킹레코드)

《송창식 골든포크》(1989년 8월 한양음반)

 

고래사냥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담배가게 아가씨

Folk In Live · 2003년

한번쯤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가나다라

나의 기타이야기

세시봉 친구들 · 2011년

우리는

Folk In Live · 2003년

사랑이야

세시봉 친구들 · 2011년

왜불러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상아의 노래

송창식 2집 · 1975년

푸르른 날

세시봉 친구들 · 2011년

비의 나그네

송창식 2집 · 1975년

하얀 손수건

송창식 2집 · 1975년

맨 처음 고백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피리 부는 사나이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그대 있음에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밤 눈

송창식 1집 · 1975년

새는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사랑

송창식 2집 · 1975년

비와 나

송창식 1집 · 1975년

창밖에는 비오고요

송창식 2집 · 1975년

꽃보다 귀한 여인

송창식 2집 · 1975년

철지난 바닷가

송창식 2집 · 1975년

밤눈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산골짝의 등불

원음으로 다시 듣고 싶다 송창식 Golden Best · 2012년

선운사

세시봉 친구들 · 2011년

날이 갈수록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토함산

세시봉 친구들 · 2011년

희망가

송창식/윤형주/김세환 트리오 기념 앨범 음반 1집(하나의 결이되어) · 1990년

축가

송창식 베스트 · 1975년

참새의 하루

세시봉 친구들 · 2011년

꽃. 새. 눈물

송창식 1집 · 1975년

딩동댕 지난 여름

송창식 1집 · 1975년

한국적 정서를 살린 음악과 개성 있는 가창력으로 인기를 모았다. 전성기 시절 엄청난 퀄리티의 시대를 앞서간 곡들을 뽑아 냈는데, 매우 많은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송창식 본인의 작사, 작곡이다.예를 들자면,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파타하 헤헤에 흐헤으헿으허허”라던가,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면 대장부가 아니지”,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 왜 불러” 한국 가요사에서 단 한 명의 천재를 꼽는다면 보컬을 비롯해 작사, 작곡까지 통틀어 ‘송창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에게 어필하는 호소력이나 심미성과 작품성 모두를 만족시키고, 시적인 감수성을 담아낸 품격있는 가사와 가락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작곡가이며, 더불어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다. 듣는 음악에서 보고 듣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중요시되는 음악으로 변모한 현대음악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한 가객으로서만 남지 않고 한국 가요사에 굵은 획을 그은 천재 가왕으로 남을 가수이자 예술가다.

송창식 집안 부모님 아버지 어머니 엄마 아빠 어린시절 학창시절 가정사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경기도 인천부 신흥동(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전사하고, 이후 어머니도 행방불명된 뒤 조부모 슬하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법적인 아버지는 6.25 때 전사한 경찰관 송모씨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화가 전혁림과 어머니 김모씨 사이에 태어난 혼외자로 알려져 있다.

인천신흥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수석입학 하였으나, 가정형편상 1년을 다닌 후 중퇴하였다. 서류상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전몰 상이군경 자녀는 퇴학시킬 수 없는 법령이 시행 중에 있어 서울예고에서 서류상으로만 특별히 졸업 처리해 준 것이라고 한다. 동창으로는 금난새가 있다. 금난새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음악에 정말 천재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가난해서 매일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바로 송창식. 애초에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꿈꾸는 클래식 전공자였으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중도 포기했다.

EBS `싱어즈-시대와 함께 울고 웃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우리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내가 어렸을 때 나를 잃어버리면 어디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면 내가 있었다. 라디오 방이라든지 약 장사들이 들고 다니는 음악책을 펼쳐 보니까 콩나물 대가리들이 있었는데 음정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가사로 부르는 게 너무 지루하니까 그걸로 부르다 음계를 알았다”라고 말했다.

8~9살 때 곡을 쓸 줄 알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모차르트`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알렸다. “사람들이 모차르트라고 했다. 나는 모차르트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그래서 내가 모차르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모차르트가 누군지 알고 나니까 엄청난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예술고교 성악과에 진학했지만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포기한 게 아니라 포기시킨 거다. 왜냐하면 낙제됐으니까. 나는 선생님이 없어 실기시험을 못 봐 0점을 받았다. 그때는 죽을 만큼 괴로웠는데” 라고 말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세시봉 출신으로 1970-80년대 포크송계를 주름잡았던 가수로 윤형주와 함께 듀엣 트윈폴리오로 데뷔했다가 윤형주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1970년에 솔로로 전향했다. 금전 관리가 철저했고 사업수완이 있었던 윤형주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 재산가가 된 반면에5 사람이 너무 좋아서 보증도 서 주고 돈도 꿔 달라는 대로 꿔 주던 송창식은 많은 재산을 잃었다. 물론, 송창식이 돈을 잘 벌던 시절에 알랑대며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빈털터리인 것은 아니며,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작권료로만 매해 7,500만원의 고정 수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쓸 만큼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라 그 시절 돈을 꿔가고 보증을 서준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도 없다고 한다. 윤형주와는 트윈 폴리오를 하기 전 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지금까지도 그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 세시봉 멤버들이 나와서 토크할 때 송창식의 가난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 달랑 기타 하나를 들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노래 불러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이 집에서 며칠 저 집에서 며칠 하는 식으로 생활했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이후 방황하다가 클래식 창법으로 대중가요계에 등장한 조영남을 만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세시봉과 오빈스캐빈에서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만났고 특히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하면서 재능이 만개했다.

음악평론가 강헌이 말하길, 가왕 조용필의 맞은편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단 한 명의 가수라 부를 수 있겠다고 했다. 수많은 히트곡과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며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맑고도 힘 있는 가창력으로 양희은, 어니언스 등과 함께 1970년대 한국 포크락을 주도한 한국 가요사에 남을 위대한 가수다. 세시봉-청개구리로 대표되는 초창기 포크음악에서, 싱어로는 아마추어를 완벽히 탈피했다는 평을 받는다.

송창식 특유의 감성과 노래 가사에 나타나는 주인공 행동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애드립부터 클래식 전공자답게 엄청난 성량까지 지닌 대단한 가창력의 소유자이다. 원래는 정확한 음정, 발음을 구사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부르는 미성이었는데, 트윈폴리오 끝무렵부터 창법이 변하였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사를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는 소리를 내고 여기에 가사를 맞추는’ 것이라 하며, 특유의 웅얼거리는 느낌이 완성되었다.

대충 부르는 듯 하지만 절대로 따라부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창법이 특징이다.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짓는 듯 한 가창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흉내만 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다. 아닌게 아니라 음악으로 득도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막말도 잘 하고 노래에 자부심이 상당한 조영남도 노래에 대해 전혀 태클을 걸지 못했다 할 정도다. 실제 윤형주에게는 염소 목소리 같다고 가수를 하지 말라고 디스를 한 적이 있지만, 송창식을 향해서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단 한번도 디스한 적이 없다.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 출연했을 당시 조영남의 증언에 따르면 노숙자도 아니고, 아주 남루한 사람이 다 뜯어진 기타를 가지고 들어와서는 클래식 가곡을 환상적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고 한다.윤형주는 경기고 출신 연세대 의대생6의 엘리트 이미지라면, 송창식은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변된다. 윤형주가 미성과 수백곡의 CM송을 작곡한 데서 알 수 있듯 대중친화적인 작곡 능력을 바탕으로 ‘팝(popular)’ 음악을 선보였다면. 송창식은 유니크한 톤의 보컬과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작곡을 통해 창조적인 예술세계를 담은 음악을 선보였다.

사실, 보컬로서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기타리스트로서도 상당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 세시봉 중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고 전문가 중에서도 보컬보다 기타 실력을 더욱 부각해서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송창식의 예술성의 깊이를 좀 더 느껴보고 싶다면, 월간 객석에서 클래식 신예 바이올리니스트인 조진주가 인터뷰(객석 2015년 8월호)한 내용이 있다.

음악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에서 그가 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로 연구하고, 어떤 철학을 가지며 연습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된다. 월간 객석은 클래식이나 연극, 무용, 뮤지컬 등 순수 공연예술을 다루는 잡지이다. 대중음악 기사도 극히 드물게 실리기는 하지만, 그 역시도 단순한 인기보다 음악사적으로 볼 때 충분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수준의 가수들이 등장한다.

송창식 결혼 부인 아내 한성숙 직업 나이차이 첫만남

송창식은 한성숙 과 1977년 결혼하였다. 배우자는 서울예술고등학교 동기인 한성숙 이다. 송창식은 음악과이고 한성숙은 미술과여서 졸업 이후에는 인연이 없었는데, 1976년 12월 31일에 열린 동창모임에서 재회하자 금새 사랑 고백을 하고 보름 뒤에 부산 처가로 찾아가 결혼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송창식 2020기준 73세 한성숙 72세로 부부에 나이차이는 1살이다.

송창식 부인 아내 대학 학교 한성숙

한성숙 는 우석대학교로 진학하여 대학 시절에 메이퀸을 하기도 했고, 스튜어디스 생활을 거쳐 외국계 무역회사 한국 지사장 등 다양한 사업가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송창식의 명곡 중 하나인 ‘사랑이야’의 작사가이기도 한데, 이는 1977년에 송창식이 향군법 위반으로 감옥에 있을 때 면회 온 한성숙 씨에게 곡의 마무리를 맡기면서 이뤄졌다.

송창식 자녀 아들 딸 입양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맏아들 송결 외에 두 딸은 모두 입양한 자식들이라고 한다. 언론을 통해 공개한 가족사에 의하면 두 딸 모두 처형과 관계가 있다. 송창식의 아내(한성숙)와 처형(한성순)은 쌍둥이 자매로 둘 다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에 재학하여, 이들 셋은 모두 동기동창 관계였다.

송창식도 약혼 전에는 처형과 더 친분이 더 있었다고 한다. 처형 한성순은 일찍 미국으로 유학하여 회화와 미술관 행정을 전공했으며, 미국에서 ‘소니아 한’이라는 이름으로 로스엔젤레스를 중심으로 행위예술가로 활동했다. 첫째 딸의 경우는 난임인 처형이 아기를 갖고 싶어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을 추진했다가 관련 법규가 바뀌면서 무산되게 되었는데, 이 아이를 거둬 기른 것이라고 한다. 둘째 딸의 경우는 이후 처형이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 및 출산에 성공했으나, 당시 처형이 직접 양육할 사정이 못 되어 이 처조카를 입양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