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장군 별세 사망 호국구민비 부인 아내 친일 이승만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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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 사망 나이 키 학력 부모 형제 가족관계 결혼 부인 아내 노인숙 자녀 딸 아들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 제7 · 10대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白善燁 | Paik Sun-yup

출생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現 남포특별시 강서구역)

사망

2020년 7월 10일 (향년 9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수원 백씨

우촌(愚村)·운산(雲山)·산남(山南)

학력

군사영어학교

재임기간

제7대 육군참모총장

1952년 7월 23일 ~ 1954년 2월 13일

제10대 육군참모총장

1957년 5월 18일 ~ 1959년 2월 22일

제4대 합동참모의장

1959년 2월 26일 ~ 1960년 5월 31일

제19대 교통부 장관

1969년 10월 21일 ~ 1971년 1월 28일

부모

아버지 백윤상, 어머니 방효열

형제자매

누나 백복엽, 동생 백인엽

배우자

노인숙

자녀

아들 백남혁, 백남흥

딸 백남희, 백남순

종교

개신교

학력

약송소학교 (졸업)

평양사범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신체

174cm

군사 경력

임관

봉천군관학교 (9기)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만주국 육군

1941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60년

최종 계급

중위 (만주국 육군)

대장2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5보병사단장

제1보병사단장

제1군단장

제2군단장

제1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연합참모본부총장

병과

보병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여순사건

출생: 1920년 11월 23일, 북한 강서군

사망 날짜/장소: 2020년 7월 10일

군복무: 만주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최종계급: 만주국군: 중위; 대한민국 육군: 대장

자녀: 백남희

형제자매: 백인엽, 백복엽

백선엽 호국구민비 칠곡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있는 백선엽 장군 공적비.

1951년 4월 1일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 3사단을 격멸한 백선엽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백선엽호국구민비는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대구를 방어하는 데 공헌을 한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위치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다부리 292의 다부동전적기념관 내에 위치한다.

장방형의 화강암으로 만든 대석 위에 이중으로 만든 장방형 받침돌을 기단으로 오석으로 만든 호패형의 비신으로 높이 135㎝, 두께 16㎝, 너비 25㎝이다.

금석문

비석의 전면에 “대한민국제일사단장 육군 준장백선엽호국구민비(大韓民國第一師團長陸軍准將白善燁護國救民碑)”이라고 되어 있다.

다부동 전투 전적지 내에 위치한다.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 가운데,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 다부동 전투에서 미군과 함께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전투이다. 전투를 기념하여 1981년에 다부동 전적비를 세웠다. 당초 가산면 다부리 414-5번지에 있던 것을 2003년 7월 다부동전적기념관 내로 이전하였다.

6·25전쟁 과정에서 낙동강 유역의 다부동 전투 상황을 이해하는 현대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간도특설대 복무전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어있는 반면 6.25 전쟁 중 다부동 전투 승리와 평양 선두 입성 등의 성과를 이룬 명장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등, 한국 현대사에서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닌 대표적 인물이다.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으며 약송소학교를 나온 이후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의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4에 진학하여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에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이 부대에 배치되어 활약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부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김일성, 강건, 김광협, 최용건 등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5 및 팔로군 소속 게릴라 부대를 주로 상대하며 여러 차례의 잔혹한 토벌작전을 벌여 악명이 자자했다. 이 때문에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이 있는 백선엽도 기계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선엽이 배치되기 한참 전인 1940년에 이미 김일성 및 만주빨치산파 독립운동가들은 토벌을 견디다 못해 동북항일연군을 빠져나와 소련 연해주로 망명하여 소련군에 배속되었으므로, 실제 독립운동가들을 맞상대할 일은 없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박정희 백선엽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숙군’과정에서 박정희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후 1949년 2월 ‘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직접 면담한 후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무죄 방면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현 군무원)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17 당시 정보에서 예산 문제로 문관 월급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판공비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다.1953년에 박정희18를 장군으로 만들어준 이도 백선엽이었다. 경무대에서는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아 제외하려 했으나 인사를 백선엽은 강행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던 백선엽은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전력을 이유로 사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발언했다.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에서 유럽/아프리카 총괄대사로 전임20되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를 떠돌다가 모친 병환을 이유로 잠시 귀국했을 때 박정희를 면담하고 나서도 2년 뒤인 1969년 12월에야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에는 교통부장관직 이후 전경련 이사와 한국종합화학 등 공기업체 사장을 두루 거치며 보상받았다.백선엽은 박정희보다 3살 어리지만 항렬로는 외할아버지뻘이다. 박정희의 모친 백남의는 수원 백씨 28세손으로 남(南)자 항렬이었고, 백선엽은 수원 백씨 27세손이다.

이승만 백선엽

이승만 대통령은 노회한 정치가답게, 전쟁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자 강력한 무력을 갖춘 세력으로 떠오른 육군 장교단을 내부 세력들이 상호 견제하게 만들어 쿠데타 가능성을 봉쇄했다. 그 핵심 세력이 백선엽을 필두로 한 평안도계, 정일권을 필두로 한 함경도계, 이형근을 필두로 한 일본육사계였다. 전후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내내 이들 3명의 대장들은 군내 요직을 돌아가며 맡았다. 이 영향으로 백선엽은 1953년 12월 15일에 한국군 최초로 탄생한 야전군급 부대인 제1야전군의 초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1952년(7대)에 이어 1957년에 육군참모총장(10대)을 역임했고, 정권 말기인 1959년에는 합동참모의장(4대)에 부임했다.

이 세 군맥 가운데 가장 큰 조직은 정일권의 함경도계로, 전성기에는 김동하, 박창암 등을 비롯해 75명의 장성이 이 계파였다고 한다. 평안도계는 40명 정도의 장성이 속해 있었는데, 백선엽은 파벌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아 장도영이 평안도계의 리더 역할을 점차 맡게 된다. 그러나 이런 3대 파벌이 군내 인사를 과점하고 요직을 꿰어차며 각종 비리를 저지르자, 여기에 속하지 못한 장교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갔다. 5·16 군사정변도 결국에는 이 파벌 구도에서 배제된 장교들(특히 김종필을 위시한 남한 출신 육사 8기생 그룹)이 박정희를 내세워 벌인 집단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선엽이 정일권만큼 노골적인 군내 정치를 벌이지 않았다 해도, 육군 내 최고위급 장군으로 이러한 내부 모순을 적극적으로 해소하지 못해 군사독재의 길을 열어준 책임은 일부 있다.

결국 백선엽은 4.19혁명 이후인 1960년 5월 31일 예편하고, 7월에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부임하였다. 그 사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박정희를 위시한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여전히 군내 강한 영향력을 가진 백선엽의 개입을 막기 위해 계속 대사 직책을 주어 외국을 떠돌도록 한다. 1961년 7월에는 주 프랑스 대사(유럽 및 아프리카 13개국까지 관할)로 발령받아 멀리 유럽으로 보내버렸고, 1965년 7월에는 다시 주 캐나다 대사로 발령내어 다시 미주에 머무르게 했다.

그렇게 거의 10년이 지나 군내 인맥이 싹 박정희 충성파들로 교체되고 백선엽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뒤에야, 박정희는 백선엽을 불러들였다. 그래도 과거 남로당 활동 전력을 비호해준 은혜를 배려했는지, 1969년 10월에는 교통부장관(19대)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핵심 화학기업이던 충주비료(1비) 사장을 맡았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호남비료(2비) 사장을 겸직하며 1973년에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종식된 1980년까지 장기간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다가 퇴임하였다.

백선엽 결혼 부인 아내 노인숙 자녀 딸 아들

백선엽 은 노인숙과 1944년 가을, 평양에서 결혼하였다.이후 아들 백남혁, 백남흥 딸 백남희, 백남순 딸2 아들2을 낳았다.

백선엽 별세 사망 나이 친일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쯤 향년 100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6·25 한국 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웅으로 불렸으나 친일 논란 꼬리를 결국 떼지 못했다.

11일 육군 등에 따르면 백 장군은 1920년 평남 강서 태어나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해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군에 입대했는데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6·25 전쟁 때 1사단장을 지냈다. 이후 1960년 예편 전까지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합참의장 등을 지냈다.

1960년 5월 대장으로 전역한 뒤엔 주중 한국대사와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교통부 장관 시절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도맡았다.

백 장관은 6·25전쟁 중 낙동강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1951년에는 동부 전선을 지키는 등 주요 전투를 지휘한 공로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 장군은 33살이던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으로 진급했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는 백 장군 스스로 꼽은 가장 치열했던 전투다. 1950년 여름 1사단장으로 당시 전투는 이끈 그는 당시 도망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내가 앞장서 싸우겠다. 만약 내가 후퇴하면 나를 먼저 쏘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두 달 가까이 부하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전투 현장은 그야말로 생지옥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백 장군의 친일 논란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그가 청년 시절 일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이력 때문이다. 그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도 이름이 올랐다.

현충원 안치 공방이 벌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5월 당시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친일파 군인의 죄상은 전공만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는데, 이에 원희룡 제주지사는 “백 장군은 6·25의 이순신”이라며 반박했다.

백 장군의 장지는 대전현충원으로 정해졌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는 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이 꽉 찼기 때문에 대전현충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